Ⅳ. 몬트리올의 네번째 교회시대


1.  20세기 카나다 프로테스탄트 교회 연합운동


♣ 카나다 종교개혁자 찰스 쉬니키 Charles Chiniquy 의 복음화 운동 이전과 이후.


아래는 퀘벡의 프로테스탄트 교단들의 교회 성장에 관한 현상을 보여주고 있는 도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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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표1> 19,20세기교단별 퀘벡 프로테스탄트 교회 성장에 관한 도표.


카톨릭 사제였던 찰스 쉬니키가 1860년대 카나다장로교회로 회심한 후부터 그가 사망한 1900년대 까지 기간의 퀘벡 기독교 부흥의 현상을 잘 나타내주고 있습니다. 그가 몬트리올을 비롯한 퀘벡을 중심으로 전국을 돌며 부흥회를 인도하며 복음을 전할 때에 퀘벡에서는 장로교회를 제외한 대부분의 교단들은 조금씩 성장하거나 적어도 현상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장로교회는 거의 수직으로 상승하고 있습니다. (엷은 하늘색)


이 모든 부흥의 가장 큰 원인중의 하나는 카나다 종교개혁자 찰스 쉬니키 Chalse Shyniky 의 열정적인 '복음화 운동'이었던 것입니다. 그는 핍박 가운데서도 죽음을 무릎쓰며 카나다 복음의 대변자로서 몬트리올을 비롯한 퀘벡의 교회들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며 복음을 전했습니다. 특히 1870년대에는 그가 집회하는 곳마다 수백명의 회심자들이 생겼습니다.


당시의 주간 신문이었던 ‘몬트리올 위트니스’ 의 증언처럼 찰스 쉬니키와 같은 복음전도자들이 활동한다면 머지않아 몬트리올은 75% 인구가 프로테스탄트 교인이 될 것처럼 보인다고 보도했을 정도로 몬트리올 퀘벡의 커다란 교회 부흥은 복음화 운동의 결과였습니다.


하지만 쉬니키의 사망 이후 20세기에 들어서면서 쉬니키의 복음화 운동을 계승하지 못한 몬트리올을 비롯한 카나다의 기독교가 뚜렷한 하락세를 면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 20세기 새로운 이민의 현상


20세기 이전의 카나다에는 미국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적은 수의 이민자들이 이주해오고있었습니다. 하지만 1885년 카나다와 태평양간의 철로 개설이 완료된 후부터는 이민이 활발하게 진행되었습니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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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20pixel, 세로 277pixel

       1881년 철도 개설 작업현장


이러한 현상은 20세기에 들어서면서 더욱 두드러졌습니다. 심지어 카나다 총인구에 비해 이민자들의 총수가 더 많아졌습니다. 어떤 기간에는 미국의 이민자들 보다 더 많았습니다. 예를들면 1900년에서 1914년 사이에 카나다의 총 인구는 아직 100만 명이 되지못했습니다. 하지만 그 기간에 약 300만 이민자들이 카나다로 이주해 올 정도로 이민이 활발했졌습니다. 또한 영국인 프랑스인들의 이민뿐만 아니라, 남부나 동부 유럽과 아시아에서도 이주해 오는 이민자들도 생겨나게 되었습니다.


교회들은 이민자들이 쉽게 정착할 수 있도록 도와주며 전도하였습니다. 대표적으로 온타리오 퀘벡 침례교 국내선교회(the Baptist Home Mission Board of Ontario and Quebec)는 1913년에 “교회는 외국인들을 복음화시킴으로 카나다인화해야한다”는 팜플렛을 발행하기도 하며 선교의 노력을 확대해갔습니다. 


♣ 자유주의 신학 유입과 교회연합운동


이렇게 이민자들을 향한 전도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동안 여러 신학의 사조들도 등장하게 되었습니다.  오직 말씀, 오직 성경을 부르짖는 종교개혁의 전통을 이어가는 복음주의위에 성경비평의 자유주의 신학과 함께 영국의 전통을 중시하는 사상이 혼합되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또 한편으로 카나다에서 가장 큰 메이저 교단을 세우고자 하는 '교회연합운동'도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2. 카나다 연합교회 United Church of Canada 태동과 출범


공식적으로 1925년에 출범한 카나다연합교회의 태동과 출범은 카나다 기독교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사건으로 이야기 되어지고 있습니다. 카나다연합교회라는 메이저 교단이 출범하기 전에 가장 큰 교단을 형성한 교파는 감리교회와 장로교회였습니다. 그당시 감리교 신학을 주도했던 인물은 나다나엘 버워쉬(Nathanael Burwash, 1839-1910)  였습니다. 그는 카나다연합교회 태동에 큰 영향을 끼쳤습니다.


♣ 버워쉬 Nathanael Burwash의 생애와 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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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Nathanael Burwash (1839–1918)


나타나엘 버워쉬는 퀘벡의 생 안드레 이스트 Saint-André-Est 에서 1839년에 태어났습니다.

그는 영국 충성파의 혈통에서 태어났고, 어린 나이에 복음을 듣고 회심을 하며 구원을 확신했으며, 감리교 목사로서 짧은 기간 목회를 하다가 1867년에 감리교 빅토리아 대학 Victoria College의 자연신학 교수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1888년에는 그 학교를 토론토 대학 University of Toronto 에 합병시켰습니다.


그는 후에 카나다의 기독교 역사가운데 가장 큰 물줄기를 형성한 감리교회, 회중교회, 장로교회가 카나다 연합교회가 태동하는데에 큰 영향을 끼친 인물이 되었습니다. 그는 때로는 복음주의적인 확신을 취했고, 어떠한 경우에는 매우 진보적인 자세를 취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래서 그는 온건하면서도 진보적인 복음주의자로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카나다 연합교회의 밑바탕에는 나다나엘 바워쉬의 보수와 진보를 아우루는 신앙이 큰 줄기를 형성하며 흐르고 있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버워쉬는 그리스도의 속죄가 객관적인 것이며 죄값 지불이 실제적인 사실이라고 끊임없이 확신하며 고백하며 주장했습니다. 또한 원죄의 실재와 성령에 의한 거듭남의 필요성도 계속 주장했습니다. 그의 생애 내내 거듭남의 중생 체험의 필요성을 쉬지않고 설교했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다윈의 진화론을 받아들이기도 하는 급진적인 신앙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아마도 그는 복음주의적인 신앙을 가진 기독교인들과 자유주의적인 기독교인들을 결합시키려는 노력을 많이 하였기에 복음주의와 자유주의를 자유롭게 넘나들었던 것 같습니다.


♣ 교회연합의 과정


1902년 위니펙 Winnipeg (마니토바 Manitoba 주의 주도) 에서 모였던 카나다감리교회 총회(Methodist General Conference)가 처음으로 카나다의 프로테스탄트 교회 연합을 결의 했습니다. 연합을 결의한 감리교회는 카나다장로교와 카나다회중교회에게 공식적으로 일치를 향해 나아갈 것을 요청하였습니다.   


카나다회중교회는 즉각적으로 응답하여 연합할 것을 승인했습니다. 곧이어 1904년 카나다 장로교회 총회에서도 교회 연합을 찬성하는 가결을 했습니다. 하지만 카나다장로교회는 내부진통을 겪으며 약 삼분의일 정도의 노회는 교회연합을 반대했습니다. 그래서 1925년까지 카나다연합교회 출범이 지연되었습니다.


당시 카나다장로교회 안에서 교단 연합의 문제는 큰 잇슈가 되어버렸습니다. 교회 지도자간에, 개체교회 안에서, 심지어는 가정 안에서까지 논쟁의 초점이 되고, 때로는 감정적인 충돌을 거듭하게 되었습니다. 19세기 '복음화운동'으로 한때 큰 부흥을 일구어냈던 카나다장로교회는 결국 '연합운동'으로 인해 붕괴 직전까지 가게되었습니다. 동료들 사이에서도 교회 연합의 문제로 친교가 끊어지는 아픈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장로교회는 내부적인 진통을 겪으며 토론토 총회에서 다수결로 최종 결정을 하여 삼분의 이 정도되는 교회들이 카나다 연합교회에 출범에 참여하였으며 나머지 장로교회들은 그대로 복음주의적인 카나다장로교회를 존속시키게 되었습니다.


♣ 카나다 연합교회 태동


비록 상당수의 장로교회들이 카나다연합교회 밖에 남아 있긴 했지만, 대략 4,800개 감리교회들, 3,700개 장로교회들, 166개의 회중교회들, 그리고 서부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수많은 연합된 교회들이 카나다연합교회 United Church of Canada 를 만들기 위해 참여하였습니다.

1925년 6월10일 토론토 시내 뮤츄얼 스트리트 아레나 Mutual Street Arena에서 감리교회,장로교회 그리고 회중교회가 중심이 되어 첫 합동 총회를 열며 카나다연합교회가 출범하게 되었습니다. 그날 약 7천명의 인원이 모였습니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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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년 6월10일 첫 카나다 연합교회 총회 


1968년에는 복음주의 연합 형제교회 The Evangelical United Brethren 이라는 교파가 카나다연합교회에 들어옴으로 4개의 교단이 합동하게 되었습니다. 1970년에는 카나다 성공회 The Anglican Church of Canada 와 합동하려는 움직임이 생겨 몇 년간 상당한 진전을 보기도 했지만 결국 결렬되었습니다.


3. 카나다연합교회 출범 이후


교회연합운동의 열매로 카나다연합교회가 출범하므로 몬트리올에서 카톨릭과 견줄 수 있는 거대 프로테스탄트 교단이 생겨나게 된 것은 크게 환영할만한 일이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상으로 많은 문제점이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하나님 나라 비전의 약화


카나다연합교회가 처음 출범할 때의 비전은 매우 긍정적이며 희망을 가져다 주었습니다. 그들은 각 교단들의 교리문제에 연연하기 보다는 카나다를 비롯한 세상의 모든 나라들이 우리 주와 그의 그리스도의 나라가 되도록 함께 일하는 비전으로 뭉친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세계 제1차 대전등의 전쟁 후유증으로 유럽이 황폐화 되는 것을 보며 그 하나님 나라에 대한 비전을 이루고자하는 열정이 식어져 버렸습니다.

 

복음의 순수성 상실.


카나다교회연합의 움직임이 지속되면서 프로테스탄트 교파에 대한 특성들이 없어져갔습니다. 카나다연합교회는 여러 교파들이 합동한 교회인 까닭에 그 신학이나 행정도 다양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습니다. 다양성을 하나로 연합하는 축복도 있지만, 한편 복음의 순수성이 연합이라는 운동속에 묻혀버릴 위험성이 더 농후해저 버렸습니다. 실재 카나다연합교회내에 복음의 순수성이 많이 상실되어왔습니다.


혼합되어지는 신앙의 본질


더나아가 카나다연합교회 안에 복음주의와 자유주의가 혼합되기 시작했습니다. 카나다연합교회가 탄생하기 전에 가지고 있던 세계복음화에 대한 비전이 단지 카나다의 전국적인 메이저 프로테스탄트 교단을 만들려는 환상으로 희석되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부흥하던 장로교회의 쇠퇴


19세기를 지나며 가장 큰 부흥을 이루어왔던 퀘벡의  카나다장로교회의 피해는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습니다. 챨스 쉬니키의 복음화 운동을 유산으로 이어가며 성장하던 카나다장로교회는 아이러니하게도 '연합운동'이라는 이름하에 가장 큰 분열을 겪으며 군소교단으로 쇠퇴해져 갔습니다. 


다음은 퀘벡교회들의 성장과 쇠퇴를 나타내는 도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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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표2> 퀘벡 복음주의 교회들의 성장과 쇠퇴


카나다장로교회의 챨스 쉬니키 목사가 왕성하게 활동하던 1800년대 중반부터 1900년 초반까지 교회가 왕성하게 부흥하였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하지만 1900년대에 들어서며 '교회연합운동'이 시작이 되었으며  카나다의 유일무이한 거대 교단을 세우는 장밋빛 꿈에 젖어  카나다 종교개혁자 찰스 쉬니키의 열정적인 '복음화운동'은 한없이 뒷전으로 밀려버렸습니다. 자연히 교회들의 성장은 급속히 줄어들었으며 카나다 연합교회가 출범한 1925년부터는 더욱 쇠퇴해져 갔습니다.


♣ 결론


20세기에 들어서며 카나다연합교회의 태동과 출범은 카나다 기독교 역사에 가장 큰 획을 그었던 역사적 사건이었습니다. 카나다연합교회의 출발이 에큐메니칼운동과 함께 교회들의 사회참여도를 높힌 긍정적인인 측면도 있지만,  교회의 담을 넘어 세상으로 복음을 가지고 들어가 세상을 복음으로 변화시키고자 하는 복음화에 대한 열정은 한없이 식어만 간 것은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습니다.


'연합운동'은 다양성과 융통성이라는 명목 하에 각 교회의 전통과 유산을 존중해줍니다. 하지만 이것은 매우 위험한 결과를 가져오기도 합니다. 즉  자유주의 전통을 가진 교회와 복음주의 전통과 유산을 가진 교회가 혼합이 되면 결국 복음주의 전통은 자유주의 전통에 흡수되어 버리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현상이 20세기 중후반을 지나면서 그대로 드러나고 있습니다.


이제는 카나다 기독교 역사에 있어서 종교 개혁자 찰스 쉬니키의 뜨거웠던 복음화 운동의 열정을 다시 회복해야할 때입니다. 복음화운동을 회복하는 것만이 카나다 프로테스탄트 교회에 소망을 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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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