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몬트리올의 세 번째 교회시대

1. 득세하는 카톨릭 교회

2. 약화되는 프로테스탄트 교회


3. 카나다의 종교개혁자  찰스 쉬니키 Charles Chiniquy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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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68pixel, 세로 400pixel  

Charles Chiniquy (1809.7.30.-1899.1.16.)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 이래로 찰스 쉬니키 Charles Chiniquy 처럼 로마교황청을 가장 부들부들 떨게한 사람은 없었습니다. 그래서 쉬니키를 ‘카나다의 종교개혁자 마틴루터’라고 부르기도 합니다.

그는 카톨릭에서 프로테스탄트로 회심한 로카카톨릭의 사제였습니다.  그는 회심 이후 매일 죽음의 위협 속에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오늘은 몬트리올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역사상 가장 중요한  인물인 찰스 쉬니키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 어린시절과 학생시절


쉬니키는 1809 프랑스 이민자들이 모여사는 퀘벡의 카모라스카 Kamouraska에서 태어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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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퀘벡시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는 카모라스카시


찰스 쉬니키는 어려서부터 성경에 대해 남다른 관심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가 어릴 때 그의 마을에 프로테스탄트 교사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 때 그는 진리를 발견하기 위해 성경이 차지하는 위치가 얼마나 큰가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니콜레 칼리지에 입학하였으며 그곳에서의 경험이 그를 사제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것은 그의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가 학교를 다니고 있었을 때, 그의 어머니는 그를 떠났습니다. 모든 재산을 그의 삼촌이 다 가져가버렸습니다. 결국 그는 누구로부터 보호받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당시 퀘벡사회의 가장 큰 영향력이 있던 카톨릭 교회의 사제가 되는 것이 자신을 보호도 하고 명성도 얻을 것이라고 여겼던 것이지요.


그는 신학생 시절 때부터 종교개혁자가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고해성사의 교리에 관하여 반복하여 질문을 하여 선배로 부터 경고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사제들의 잘못된 행동등에 관한 많은 질문을 가지고 있었으며, 그 질문에 대한 답을 성경에서 찾아가고 있었습니다.



♣ 절제운동의 사도


찰스 쉬니키는 1833년에 퀘벡교구에서 로마카톨릭의 사제로 안수받았고 이어서 생 로크 St. Roch, 보포트 Beauport 그리고 그의 고향 카모라스카 Kamouraska등에서 사제의 사역을 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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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카톨릭의 사제 챨스 쉬니키


그러던 중 그는 1839년부터 그를 유명하게 만들어준  "절제운동"을 시작했습니다. 19세기의 가장 성공적인 불어책으로 꼽히는 술을 끊는 방법에 대한 책을 출판하기도 할 정도로 그는 카나다에서 절제운동의 선구자의 역할을 했습니다. 그 후 그는 1844년에 몬트리올에 이주하여 절제운동 사역에 더욱 집중하게 되었습니다.


☞ 왜 그는 절제의 사제가 되었는가?


그는 어릴 때부터 술 취한 사람들에 의해 공포심을 느꼈습니다. 특히 그는 어릴 때 아버지를 여의고 삼촌과 함께 지내기도 했는데 그는 술만 취하면 주정을 하며 어린 쉬니키를 괴롭혔다고 합니다.  또한 당시에 프랑스가 영국과의 식민지 쟁탈 전쟁에서  패배를 당한 이후에 많은 불어권 사람들이 절망감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많은 술을 소비하는 지역이 되어가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것들이 그를 사제로서 금주 금연등의 절제 운동을 하게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제가 몬트리올에 이주하여 목회를 시작할 즈음인 2000에 몬트리올은 경제적으로나 인구수로나 퀘벡주에서 가장 큰 도시였습니다. 하지만 카나다에서도 토론토 다음으로 거대도시인 몬트리올이 카나다 전체의 도시중에서 알콜중독자들, 마약복용자들, 우울증 환자들, 그리고 홈리스 피플들이 가장 많았으며 자살률도 제일 높은 도시로 조사되었습니다. 그만큼 프랑스 이주민들은 늘 피해의식 속에 살아왔음을 알 수 있습니다.  19세기 몬트리올의 상황은 지금보다 더욱 심했고 많은 사람들이 술에 중독되어 살아가고 있었습니다.


챨스 쉬니키는 19세기에 몬트리올을 비롯한 카나다에서 벌인 절제운동의 효과는 매우 컸습니다. 그 운동의 결과로 퀘벡에서 프랑스계 카톨릭 교인들의 반 수 이상이 완전한 금주를 실시할 정도까지 되었습니다. 곧이어 카나다 전역과 심지어 미국에 까지도 넓혀졌습니다.  그 절제운동의 결과로 1874년에 그는 교황과 주교로부터 “절제의 사도”라는 칭호를 받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카나다 의회로부터 상금을 받기도 했으며, 그의 절제운동에 많은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인들도 지지하며 동참하였습니다.



♣ 갈등


쉬니키는 신학생 시절과 사제안수를 받고 절제운동을 하는 중에도 주기적으로 생기는 의문들을 지울 수가 없었습니다. 그는 의문들을 기록하여 놓았습니다. 예를들면, 성찬식의 빵에 하나님 임재에 대한 신학적인 궁금증에서 부터 사제들의 부정과 스캔들에 대한 진지한 물음들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종교개혁의 가장 큰 동기는 비성경적인 카톨릭 전통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비추어 볼 때 퀘벡 카톨릭의 가장 큰 특징인 교황권 지상주의 Ultramontanism 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와같은 것들이 카나다에서 종교개혁을 불러일으키게 되는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러던 중에 쉬니키는 1851년 미국 일리노이주 디트로이트시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는 카나다 이주민들이 어려운 삶을 살아가는 것을 보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 자신을 그곳으로 인도하셨다는 것을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곧 일리노이주의 프랑스 식민지인들을 위한 사제가 되었습니다. 생 앤  St.Anne에서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는 퀘백의 신문사를 통해 새로운 땅에 관해서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 퀘벡주민들의 도움을 요청하였습니다. 그러나 쉬니키의 개혁적인 활동을 달갑지 않게 보았던 아일랜드 교구의 주교는 그를 정직시켜 버렸습니다. 하지만 쉬니키는 계속하여 일리노이의 카나다 이주민들을 위하는 사역을 하게 되었습니다. 당시에 아브라함 링컨이 카톨릭과 대항하는 그의 변호사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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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니키의 변호사였던 아브라함 링컨


링컨은 법정 밖에서의 화해하게 하여 쉬니키의 사제직 정직의 사태를 수습하려고 하였지만 실패했습니다.


결국 챨스 쉬니키는 1856년에 주교에 대한 불복종으로 사제직 정직을 당하였으며, 곧 이어 1858년에 카톨릭에서 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일리노이주의 교인들은 모두 그를 지지하며 따랐으며 쉬니키와 함께 카톨릭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마치 모세가 새로운 땅 가나안 땅을 향하여 이스라엘백성들을 데리고 출애급한 것처럼 쉬니키는 일리노이주의 교인들과 함께 새로운 구도의 여행을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 회심


몬트리올의 그랑린 선교회의 Grand Linge Mission의 테오도르 라플러 Theodore Lafleur 목사가 여름에 생 앤시 St. Anne 을 방문하여 쉬니키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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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니키의 회심에 결정적 역할을 한 라플러 목사


쉬니키와 라플러는 거의 15시간 동안 참신앙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그들은 그 대화를 하나님이 인도하신다는 것을 깨달았으며 대화 후에 그들은 주님께 무릎을 꿇었습니다. 그리고 쉬니키에게 빛을 비추어 주시며, 이 숭고한 순간에 성령께서 힘을 주시도록 기도했습니다. 


라플러 목사는 그 당시를 이렇게 회상했습니다. “나는 결코 그의 눈을 잊을 수 없습니다. 새로운 하늘의 빛으로 반짝거리는 그의 눈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는 알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영적으로 아무리 표현한다고 하여도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크시다는 것을.....  ”


쉬니키는 후에 그의 자서전 “50년” 50 Years 에서 그의 회심의 순간을 회고했습니다. 고린도전서7:23절을 통해 회심을 하게 되었음을 밝히고 있습니다.  “나는 한 빛에 둘러싸여 있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그 빛을 통해 구원의 길을 보았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비밀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가 나의 기도의 대답이었음으로 깨달았습니다. 나의 죄악의 산이 제거되었습니다. 그리고 나는 나를 전적으로 그리스도에게 드리게 되었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로마의 교회에서 나와라, 너는 그 교회에 의해 구원받을 수 없다’ ”


쉬니키는 자신이 죄와 허물로부터 구원받았음을 확실하게 믿게 되었습니다. 


“ 나에게는 카톨릭에서 구원받기 위해서 믿었던 도구들이 있었습니다. 즉 면죄부, 염주, 수사의 옷, 고해성사, 동정녀의 기도, 성수, 미사, 연옥등등이 구원의 수단으로 주어졌으며, 이것들로 인해 로마카톨릭은 기만되어졌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내 영혼의 구세주입니다.”


쉬니키는 카톨릭이 너무 많은 것들이 영적으로 남용되어지고 있음을 강조하였습니다. 그는 계속하여 회심의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어두운 밤을 몰아내셨습니다. 나의 지식 안에 있는 카톨릭의 제도와 교리들을 물리치셨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영생’은 내 자신의 상급으로 얻을 수 없음을 보이셨습니다. 그분은 그가 나의 마지막 죄의 빚까지도 지불하기 위하여 갈보리에서 돌아가셨으며 나는 나의 죄에서 구원받았습니다 ”


심지어 그는 카톨릭 사제로 수십년을 일해왔지만, 회심하기 전의 상태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였습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전혀 알지 못했던 것이었습니다. 교황에 대해서만 안 것이 전부였습니다. 어느 날 나는 예수님이 얼마나 나를 사랑하시는지를 성경을 읽다가 깨닫게 되었습니다. 나는 내 자신을 그에게 드리기로 하였습니다.”


그의 인생 말년의 저서인 ‘40 years'에서 “우리의 자비로우신 하나님이 나를 교황의 발 끝에서 나를 자유하게 하시고 그의 피로 씻어주신 어린양의 발끝으로 끄집어 내셨습니다.” 라고 고백하고 있습니다. 



♣ 핍박


찰스 쉬니키가 카톨릭 교회를 떠나자마자 쉬니키에 대한 무자비한 공격과 핍박이 시작되었습니다. 퀘백교구의 주교는 일리노이에서 그에 대한 불리한 정보들을 수집했습니다. 쉬니키에 대한 악소문들을 퍼뜨렸습니다. 예를들면, 쉬니키는 성적인 포식동물과 같아서 사제직을 포기했다거나, 그는 자기중심적 반항자이며, 개신교의 돈을 먹은 비윤리적인 악마의 추종자 등 온갖 악선전들을 신문들을 통해서 하였습니다.


하지만 쉬니키는 로마카톨릭의 공격을 받으면서도 성경을 기초로 한 복음주의 신학을 발전시켜 나갔습니다. 그는 성경에 비추어서 퀘벡 카톨릭의 가장 큰 특징인 교황권 지상주의 Ultramontanism 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밝히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설교는 카리스마가 넘치는 설득력을 갖추기 까지 하였습니다.


쉬니키에 대한 핍박은 끊이지 않았습니다. 그의 강연 참여를 금지시켰으며, 그가 저술한 책을 읽는 것도 금지시켜 버렸습니다. 스캔들에 대한 루머들을 퍼뜨리는 것과 반복되는 난폭한 신체적 위협들을 통해 그를 총체적인 고립에 빠뜨리기도 하였습니다. 쉬니키는 적어도 20회에 걸쳐서 돌에 맞는 핍박을 당하였습니다. 칼로 위협을 받기도 하였으며 납치를 당할 뻔 하기도 하였습니다. 지속적인 죽음의 위협을 받았습니다.


1876년 8월에 프린스 에드워드 아일랜드 PEI 에서 그는 그의 아내와 두 딸들과 함께 위협적인 군중들에 포위되어 죽을 뻔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혼자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때로는 몸을 보호하는 특수한 옷을 입기도 하였습니다. 투석을 대비하여 무거운 모자를 쓰기도 하며 두꺼운 직물의 베개등을 그의 어깨위에 넣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회심한 후부터 카톨릭 교회의 계급주의를 비난하며 기독교인의 신앙의 기본인 성경으로 돌아가야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습니다. 진리를 확신하며 오직 은혜, 오직 믿음의 개혁주의 신앙의 필요성을 인정하며 또한 복음 전도를 촉진하는 복음주의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은 곧 쉬니키의 노력에 감동을 받기 시작했습니다.


한때 카톨릭 교회에서 쉬니키에게 화해를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나 주교에 대한 완전한 복종을 전제로 한 화해는 그의 근본적인 교황권 지상주의 Ultramontanism에 대한 의문과 부정한 주교에게 복종할 수 있는가 에 대한 회의만 더해 줄 뿐이었습니다.



♣ 장로교 목사가 된 쉬니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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쉬니키는 회심한 후에 장로교에 가입하게 되었고 결국 1858년 쉬니키는 카톨릭으로부터 출교를 당하였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결과는 쉬니키에 대한 개혁의 열정만 더욱 키워주었습니다.


쉬니키는 출교를 당하는 순간 이렇게 말했습니다. “교회 역사는 많은 주교들이 죄악을 생산해 낸 것을 증명하였습니다. 그 죄악의 주교들은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의무와 반대되는 것을 요구하였습니다. 이에 대한 나의 저항은 교만이 아닙니다. 오히려 매우 도덕적입니다. 주교들이 지혜, 정의와 사랑이라는 신성한 길에서 떨어지는 순간부터 그들은 순수한 무리들을 잘못 남용하는 인간들이 되어버렸습니다. .... 아마도 내가 너무 경솔하게, 혹은 너무 강하게 말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 혼자입니다, 초라한 선교사로, 너무나도 많은 그리고 파워풀한 고위성직자들과 싸우고 있는 초라한 선교사로 있습니다. 내가 말하고 행동하는 에너지는 나의 연약함 안에 근원을 갖고 있습니다.”


쉬니키가 회심할 당시의 대표적인 몬트리올의 프로테스탄트 신문 ‘Montreal Witness'는 공개적으로 쉬니키의 회심을 위하여 기도요청을 하였습니다. “주교의 폭력과 탐욕에 대항하는 한 대중적이고 당당한 사제의 저항.....  교회의 속성에 대한 의문점이 모든 저항자들의 바닥에 있다. ......  사실, 성경은 신부들과 그의 친구들에 의해서 인용되어지고 있지만, 오직 말씀은 사제들의 횡포에 반대 쪽에서 선택되어지고 있습니다. ”
 
출교를 당한 쉬니키와 St.-Anne 교회는 당장 재정적으로 타격을 받게 되었습니다. 기금 마련을 위해 동부지역을 여행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때 많은 복음주의 기독교의 도움을 받게되면서 그는 프로테스탄트 교회에서 설교하게 되었습니다.


1864년 그는 일리노이주 St.-Ann의 Euphemie Allard와 결혼하였습니다. 그들은 한 아들과 두 딸을 두었습니다. 아들은 어릴 때 죽었고, 두 딸은 목사들과 결혼하였습니다. 1870에 쉬니키는 카나다 불어권 선교회 FCMS 로부터 6개월 선교를 위하여 초청받았습니다. 그 후 그는 1875에 몬트리올의 커닝 Canning St.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었습니다. 그는 1888년 은퇴한 이후에도 1899년 사망 때까지 영국을 비롯한 유럽대륙을 돌며 거의 매일 부흥회 인도와 강의를 하였습니다.


1899년 1월 16일에 몬트리올에서 소천하여 몽로얄 Mont Royal 공동 묘지에 안장이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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몽로얄 공원에 있는 쉬니키의 묘지



♣ 쉬니키의 메시지, 복음전파과 전도


쉬니키는 회심 이후, 마틴루터와 같이  매우 정열적으로 또는 냉철하게 자기의 에너지를 복음전파라는 '복음화운동'을 위해 쏟아 부었습니다. 지금도 세계 곳곳의 복음주의 선교사들은 종종 쉬니키의 저서들을 의존하는 것을 보면, 회심 이후 그의 영향력이 얼마나 큰 지 알 수 있습니다.


그는 복음만이 정의와 평화를 가져올 수 있다고 믿으며 '복음화운동'을 전개 해 나갔습니다. 그는 어디를 가던지 늘 성경을 읽어야함을 강조했습니다. 성경이 세상에서 가장 값진 보화라는 것을 전했습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는 어디를 가던지 인간적인 권위에 복종할 것을 포기하고 복음의 권위에 복종해야함을 전했습니다. 그는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사람들의 종이 되지말라”는 고린도전서 7장 23절 말씀을 자주 인용하였으며 오직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메시지를 중요하게 전했습니다.


♣ 결론- 카나다의 종교개혁자 쉬니키.


쉬니키는 사도바울과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카나다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을 핍박했던 사울과 같은 사람이었고 예수님을 만나 회심하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또한 쉬니키는 모세와 같은 사람으로 묘사될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카톨릭의 종으로 있던 일리노이의 교인들을 종에서 자유인으로 이끌어 내었기 때문입니다. 카나다에서 출애굽 사건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또한 그는 종교개혁자 마틴루터의 생애와 비슷합니다. 성경의 권위를 나타내며 성경을 인용하며 인간의 권위에 불복종한 점, 결단력이 강한 인상을 주는 논쟁 그리고 영향력 있는 저술작업 등이 루터의 생애와 같습니다.


쉬니키는 여호수아, 다니엘과 같이 결코 거룩한 전쟁에서 후퇴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많은 카나다인들에게 감동을 선사하였습니다.  모어 Moore 교수의 시는 많은 감탄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우리 시대에 떠오르는 우리의 챔피온, 그 이름 쉬니키
     끌려다니지 않으며 피를 흘리며 교황과 맞선다.
     이 신앙의 기사는 계속 싸운다.
     그는 강철같은 의지로 정의를 위해 일한다.”


그는 “자유와 복음의 대변자”였습니다. 그의 이름은 모든 더러움에서 보존될 것입니다.  그는 몬트리올에 복음전파를 위한 싸움에서 결코 패배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잠자고 있는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을 깨웠습니다. 진리를 묵인하는 카톨릭에 알람을 울렸습니다.


쉬니키가 몬트리올을 비롯한 퀘벡의 교회들에서 부흥회를 인도하며 '복음화운동'을 해 나가는 동안 퀘벡에는 헤아릴 수 없는 부흥과 성장을 이루었습니다. 특히 1875년과 76년 사이에는 그가 가서 집회하는 곳 마다 수백명의 회심자들이 생겼습니다.


‘몬트리올 위트니스’ 는 다음과 같이 기록했습니다. “한 해에 다섯개 내지 여섯개의 교회들이 생겨나고 있다. 그것으로도 충족되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 나아간다면 몬트리올은 75% 가 프로테스탄트 교인이 될 것이다” 찰스 쉬니키의 사역은 몬트리올의 기독교역사에 큰 영향력을 끼쳤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의 회심은 지금까지도 복음주의 회심의 모델이 되고 있습니다.

카나다 기독교역사에서 19세기는 “기독교의 세기”로 이컬어지고 있습니다. 찰스 쉬니키를 중심으로 한 '복음화운동'이 활발히 전개되면서 자연적인 교회 부흥으로 열매맺었기 때문이지요. 


쉬니키의 생전의 고백이 저의 가슴을 울립니다. 

 

“회심한 다음 날 부터 나는 희생을 각오했습니다. 그들은 매우 자주 돌, 몽둥이, 단검과 권총등으로 나를 공격했습니다. 나는 가격을 당하였고, 멍이 들었습니다. 나는 매일 그들의 공격에 죽을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테러로 죽음을 당하여도 영원한 기쁨을 얻을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나는 하늘에서 왕관을 받을 것을 확신하였습니다. 나의 사랑하는 구세주의 목적을 위해서 나의 마지막까지 드릴 수 있다면, 나를 위해서 죽으신 그를 위해 죽을 수 있다면.....”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