Ⅲ. 몬트리올의 세 번째 교회시대


세 번째 교회시대는 불어권 선교가 활발하게 진행되다가 1837년에 발생한 ‘퀘벡 반란’(혹은 '애국반란'으로도 불리웁니다.) Lower Canada Rebellion 사건을 계기로 하여 카톨릭 교회가 득세하고 프로테스탄트 선교가 약화되는 시대입니다. 카톨릭 교회가 퀘벡의 정치와 교육등을 장악해버린 시대이기도 합니다.


1. 득세하는 카톨릭 교회.


♣ 19세기 중반의 퀘벡의 정치적인 상황


여기에서 잠깐 19세기 퀘벡의 정치적인 상황을 살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보수적인 카톨릭 종교와 프랑스 문화가 득세하던 1830년대에 퀘벡과 온타리오에서 자유주의적인 정치적 발언들이 높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몇 진보적인 정치인들이 미국의 모델을 쫓아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추구하게 되었던 것이지요. 이로인해 1837-1838년에 퀘벡에서 정치인 루이 조셉 파피노 Louis Joseph Papineau를 중심으로 반란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이 사건은 미국의 시민전쟁에 견줄만한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실패하게 되었고, 이 사건으로 진보적인 정치인들이 퀘벡에서 피신하여 미국으로 도피하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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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인이자 변호사였던 파피노


파피노는 추종자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민주주의의 거대한 물결이 시간의 경사면을 따라 저항할 수 없이 흘러내려왔다. 이제 점점 빨라져서 민주주의에 대항하는 무익한 장애물들을 쓰러트릴 것이다.”


1837년에 몇 달간 이들의 발언들이 더욱 과격해지면서 급진 세력들이 군사 행동에 들어가는 실수를 범했습니다. 그리고 그들과 대치하기 위해 영국정부를 위하는 시민군이 급히 소집되었습니다. 이 작은 전쟁에서 반란자들은 결정적인 패배를 당했습니다. 파피노와 그의 추종자들은 미국으로 달아났습니다. 그에 반해 퀘벡에서는 영국 충성파 Loyalism 엘리트들이 카나다인들 사이에서 대폭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지요.


이 반란사건을 일으킨 사람들이 간과한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카나다 사람들은 미국의 길을 따르기를 원치 않는다는 것입니다. 당시 퀘벡의 분위기는 미국의 정치적 가치를 책택하는 분위기가 전혀 없었던 것이지요.  퀘벡의 지도자들은 영국에 대해 별다른 애정이 없었지만, 퀘벡이 미국에 흡수되는 것은 더더욱 원치 않았습니다.


카나다인들은 1837-1838년의 ‘반란사건’에서 희생된 적은 수와 미국 시민전쟁에서의 희생된 수십만 명을 대조하며 미국을 비난하는 것을 즐겨하기도 합니다. 카나다인들은 시민혁명을 잘 막았는데, 미국인들은 어리석어서 시민전쟁을 막는 데 실패해버렸다는 것이지요.



당시 정치적 상황과 퀘벡 카톨릭 교회와의 관계.


 1837년의 반란이 실패하여 파피노가 불명예를 지고 미국으로 도주했을 때, 카톨릭 교회는 퀘벡 사회의 지배력을 공고히 할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당시의 로마카톨릭의 몬트리올교구의 주교가 도망자 파피노의 사촌인 쟌-자크 라티그 Jean-Jacques Lartigue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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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트리올 교구의 라티그 주교


그의 주도 아래 퀘벡의 교육 시스템을 카톨릭 전통 아래에서 더욱 엄격히 주민들을 통제하게 되었습니다. 카톨릭 교회는 퀘벡에 미국의 개인주의와 민주주의 정치가 도입되는 것을 늘 두려워했습니다. 그에 따른 조치로 카톨릭교회는 1840년 후부터 1세기 이상 동안 퀘벡에서 프랑스어를 사용하는 모든 시민들은 교회의 지도를 받을 수 밖에 없는 교육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해 1840년 이후 카톨릭교회와 프랑스-카나다 문화사이의 유대관계는  전보다 더욱 밀접하게 가까워 졌지요.


이 당시의 퀘벡의 카톨릭 교회는  영미전쟁 이후에 브리앙 주교가 취했던 행동과 마찬가지로,  영국 국왕에게 절대적인 충성을 하였습니다. 영국 정부는 이에 대한 보답으로 카톨릭 교회 중심의 퀘벡 사회를 묵인했습니다. 교육제도도 카톨릭 중심의 시스템을 구축하게 되었지요. 카톨릭 교회가 카나다의 정부와의 결속이 매우 강화되었습니다.


라티그 주교의 뒤를 이어 이그나스 부르제 Ignace Bourget 주교의 지도 아래 퀘벡은 국가적, 제도적으로 더욱 힘을 강화시켰습니다. 부르제는 유럽의 평수사들과 수녀들과 사제들을 모집했습니다. 수많은 학교들과 병원들을 설립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화려한 성당 건축물이 세워지거나 보수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때 지어진 대표적 화려한 성당이 바로 올드 몬트리얼 Old Montreal에 세워진 노트르담 성당 Notre-Dame Basilica 이었습니다. 이 성당은 당시 19세기 북미에서 가장 화려하고 큰 성당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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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미에서 가장 아름다운 성당으로 꼽히는 노틀담 성당 

1824년에 재건축시작하여 1843년에 완공되었다.


또한 그와 버금가는 생안드보프레 성당이 퀘백시에 생기게 되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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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시에 지어진 St.-Anne-de-Beaupre 성당.


부르제 주교는 사제들을 향해 교구민들에게 오직 보수당(토리당)에만 투표해야 한다는 말을 전하도록 지시했습니다. 카톨릭교회는 자신들을 지지하는 정치인을 밀어줌으로써 그들은 장기집권을 보장받게 되었고 정치인들은 카톨릭 교회를 지원하는 거대한 공생관계를 형성하게 된 것이지요.


이로인해 카톨릭은 20세기 중반까지 꾸준히 발전하게 되었습니다. 많은 평신도 수사들이 학교에 진출하여 일하게 되었습니다. 퀘벡의 인구는 매 분기 마다 두 배로 늘어났습니다. 시골과 도시의 성당들에 대한 순례여행들은 일상적인 일이 되었습니다.


2. 약화되는 프로테스탄트 선교.


♣ 이주


카톨릭 교회가 득세하는 사회 분위기에서 프로테스탄트 전도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여기에다 급격하게 늘어나는 인구에 비해 일자리 부족현상이 나타나면서 주민들이 몬트리올을 떠나는 현상들이 나타나게 되었습니다. 그들은 일자리를 찾아 카나다 서부지역이나 미국으로 이주하게 되었습니다. 그들 가운데는 다수의 프로테스탄트 교인들도 포함되어 있었지요. 남아있는 퀘벡의 많은 불어권 주민들은 농촌생활의 어려움 등으로 빈곤층으로 전락하게 되기도 했습니다.

 

심지어 영국 국교회가 세워지고 영국계 교인들이 많이 정착해왔던 몬트리올 동부의 이스턴 타운십 Eastern Township의 프로테스탄트의 땅을 카톨릭 교회에서 구입해버리는 일도 나타나면서 프로테스탄트 기독교가 쇠퇴하기 시작했습니다. 생활의 유지가 어려운 목회자가 직장을 구하러 미국으로 떠나기도 하면서 교인수가 줄어들어 교회 유지가 어렵게 되었습니다.


♣ 박해


여기에다 카톨릭의 득세는 프로테스탄트 교인들을 향한 카톨릭의 박해로 이어지기도 했습니다. 이러한 박해로 인해 이민을 떠나는 교인들도 생겨났습니다. 대표적으로 록스톤 퐁 Roxton Pond 시에서는 1865년에 150명의 교인들이 떠나버렸습니다.


이와같이 퀘벡의 불어권 선교가 쇠퇴해가는 듯이 보였지만 하나님은 몬트리올을 비롯한 퀘벡 주에 한 종교개혁자를 통해 부흥을 시키고자 하는 계획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 부흥사가 바로 19세기 카나다의 종교개혁자로 알려진 챨스 쉬니키 Chalse Chiniky 였습니다.  다음 시간에 챨스 쉬니키를 만나도록 하겠어요. ^^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