Ⅱ. 몬트리올의 두 번째 교회시대 (1760~1867)


1. 영불전쟁과 그 이후


본격적인 몬트리올의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써 내려가기 전에 몬트리올 주변의 아메리카 대륙과 유럽의 상황들을 영국과 프랑스를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몬트리올의 두번째 교회시대는 영국과 프랑스가 식민지 전쟁을 했던 소위 7년전쟁이라고도 불리는 영불전쟁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에 영국군인들이 1760년 9월에 몬트리올에 상륙합니다. 그때부터 최초로 4개주의 카나다 연방정부를 탄생시킨  '카나다 동맹' Canadian Confederation 을 결성하는 1867년까지의 기간을 말합니다.


영국과 프랑스의 관계는 중세 이후로, 유럽대륙의 주도권 및 식민지 쟁탈을 놓고 서로 적대적인 경우가 많았습니다. 지금도 유럽인들에게 가장 인기있는 축구경기중에서 영국과 프랑스가 시합을 하면 거의 전쟁하는 매우 거친 분위기 속에서 치뤄지고 있습니다. 양 국가의 경찰들이 축구 광팬들 사이에서 큰 곤혹을 치루곤 하지요.


양 국가의 적대적인 관계는 오래 전부터 시작이 되었지만 종교개혁 이후에 더욱 선명해졌습니다. 종교개혁 이후에 영국의 대다수 국민들은 프로테스탄트로 개종하게 되므로 로마 카톨릭이 절대적으로 우세한 프랑스와 더욱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양 국가에서는 시민들의 격렬한 종교분쟁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프랑스에서는 위그노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인들이 엄청난 핍박을 받았고 영국의 카톨릭 신자들은 프랑스로 피신하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서로간의 갈등은 정치적인 분야를 넘어 거의 모든 종교 사회적인 분야로 확장되었습니다. 



 

영국의 승리와 파리조약


그러던 중에 양 국가는 북아메리카 대륙에서 소위 영불전쟁이라 불리는 식민지 전쟁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와 영국의 식민지 경쟁은 17세기 이래 계속되어 온 것이었습니다. 이 식민지 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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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임스 올프장군이 승리한 1759년 퀘벡전투


영불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함으로 1763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소위 파리조약을 맺게 되었습니다. 이 조약을 맺음으로 영국은 퀘벡을 비롯한 카나다와 인도를 지배하게 되었지요. 결국 영국은 세계 제국으로서의 지위를 확보한 반면 프랑스는 해외 식민지를 거의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2. 승승장구하는 카톨릭 교회


자, 영국이 프랑스와의 영불전쟁에서 승리함으로 퀘벡과 몬트리올은 영국이 주인노릇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곧 몬트리올과 퀘벡이 거대한 카톨릭 종교의 사회 분위기에서 프로테스탄트 로 이동할 수 있는 당연한 기회를 얻게 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어찌된 영문인지 퀘벡에서 종교,정치,경제,문화적인 영역뿐만 아니라 교육 분야에서도 카톨릭의 영향력은 더욱 견고해지고 확산되어지는 것이었습니다.


제가 몬트리올에서 목회하며 그리고 교회사를 공부하며 궁금해 하던 것 중의 하나가 왜 영국이 영불전쟁에서 승리하여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사회가 세워질 수 있음에도 오히려 카톨릭이 더 승승장구하게 되었을까?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면 이제부터 영불전쟁 이후 프랑스가 패배를 당하여 식민지를 빼앗겼는데도 어떻게 하여 카톨릭 교회가 몬트리올에서 더욱 견고해졌는지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는 크게 다섯 가지 이유들이 있었습니다.  



♣  영국의 바쁜 상황


첫째로, 영국정부는 해외 식민지를 얻게 되었지만 그곳을 관리하는 것보다 유럽에서 나폴레옹의 프랑스 군대와 싸우는 일에 훨씬 더 많은 힘을 쏟아야 했습니다. 즉 영국의 바쁜 상황으로 인해 영국정부는 퀘벡을 카톨릭 교회 지도자들에게 식민지를 위임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지요.


  퀘벡 법률 Act of Quebet   시행


둘째로, 영국정부는 1764년 퀘백법률 ACT OF QUEBEC 을 시행하므로 프랑스 주민들이 재산권이나 차별금지를 보호받을 수 있었습니다. 이를 통해 프랑스 주민들과 카톨릭교회가 어느정도 보호를 받을 수 있었습니다. .

보수적인 프랑스 사제들의 퀘벡 망명


한편 프랑스에서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로마 카톨릭의 사제들은 많이 시달렸습니다. 프랑스의 정치의 무게중심이 혁명이후 로마카톨릭에서 국왕에게로 이동이 되었습니다.  그때 45명의 보수적인 프랑스 사제들이 퀘벡으로 망명하는 큰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퀘벡에는 카톨릭 사제들이 늘 부족했기에 프랑스에서 넘어 온 이들의 영향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대단히 컸습니다. 프랑스에서 온 사제들은 프랑스 혁명을 피해서 온 사제들이기에 프랑스 혁명이 지향한 자유사상을 거부한 것은 당연했지요.

이들은 매우 보수적이며 교황권이 그 어느 지역보다 강화되어있던 퀘벡의 카톨릭 교회를 더욱 견고하게 해 주었던 것입니다.


미국 독립전쟁


그런던 중 카나다인들의 충성심을 결집시키고 민족주의의 시작을 촉발시킨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그것이 곧 1812년에 발생한 영국과 미국 사이에 벌어진 영미전쟁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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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퀘벡을 공격하는 미국독립군


미국에서는 이 전쟁을 미국의 독립을 확인시킨 매우 사소한 전쟁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나다인들에게는 지금의 카나다 국가의 사회 청치 체제를 낳게 한 중요한 전쟁으로 인식되어지고 있습니다. 이 전쟁으로 인해 퀘벡은  종교, 문화적으로 미국과 뚜렷한 차이점들이 생겨났습니다.  


퀘벡인들은 보수적인 카톨릭의 종교와 그의 영향력으로 세워진 사회 분위기상 유럽의 시민 혁명 이전의 상태가 지속되기를 원했습니다.  전체 카나다인들에게도 과거와 전통을 존중하는 마음이 컸습니다. 왕을 공경하는 마음도 미국인들과 비교도 안될 정도로 컸습니다. 카나다의 영국 이주민들은 영국의 전통을 이어받기를 원했으며,  특히 퀘벡인들은 프랑스혁명 전의 유럽의 전통들이 미국처럼 힘에 의해 훼손되는 것을 원치 않았습니다.

카나다는 당시에 유럽 전체에 불고있던 “자유”를 시민들의 삶에 최고의 가치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사람들과 더불어 사용해야 하는 소중한 일용품 중의 하나에 불과하다고 보았습니다.


당연히 카나다는 미국의 모델을 쫓아 독립을 추구하지 않았습니다. 퀘벡도 미국의 정치와 종교적 가치 체제를 채택하지도 않았습니다. 결과적으로 1812년의 영미전쟁으로 인하여 카나다는 미국과 제도적으로 더 멀어지게 되었습니다. 영국과는 더욱 가까와졌지요.


이와같은 상황 속에서 영미전쟁에서 패배를 당한 영국 충성파들이 카나다 퀘벡과 온타리오로 이주하는 결정을 손쉽게 할 수 있었습니다.  이들은 카나다에서 환영을 받게되었습니다.  이들은 온타리오주의 토론토에 이주하여 정착하였으며  몬트리올에서 가까운 동쪽 도시들 Eastern Township  으로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불어를 주로 사용하는 퀘벡 지역에서 영국 충성파들이 정착하여 삶의 터전을 마련했던 이 지역에서만큼은 영어를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영국적인 분위기를 지금도 유지하고 있습니다.

 

결국 이러한 일련의 상황들은  퀘벡의 카톨릭 교회가 영국정부가 가까워질 수 있는 환경을 만들어 주기에 충분했지요. 


영국 식민지 아래에서 카톨릭 교회를 지킨 두 인물.


이러한 상황과 더불어  프랑스가 식민지 전쟁에서 패배를 당했음에도 퀘벡에서 카톨릭 교회가 더욱 확장될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가 퀘벡 안에서 생겼습니다. 두 인물의 정치적 활약이 매우 컸던 것이지요.


 ☞ 쟝 올리비에 브리앙 Jean-Oliver-Briand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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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불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였음에도 퀘벡에서 카톨릭 종교가 더욱 승승장구하게 된 데에는 1766년 3월에 퀘벡 교구의 주교로 임명된 장 올리비에 브리앙 Jean-Olivier Briand 의 역할이 매우 컸습니다.


브리앙 주교는  미국독립전쟁 당시에 프랑스 본국과는 반대로 철저히 영국을 지지하였습니다. 심지어 그는 미국에서 커져가는 미국독립세력을 이단이라고 부르기까지 하며 영국에 충성을 다했습니다. 브리앙 주교를 중심으로 퀘벡은 미국에서 도피한 영국 충성파들을 환영하며 받아주는 정치력을 발휘하기도 했습니다. 그로 인해 퀘벡의 카톨릭 지도자들은 일치단결하여 영국 정부 뒤에 줄을 섰습니다.


심지어 브리앙 주교는 카톨릭 성직자들에게 미국독립을 찬성하는 카나다인에 대해서는 성례집행을 거부하도록 지시하기까지 했습니다.


이러한 노력으로 인해 카톨릭 교회는 영불 전쟁 이전보다 더 많은 특권들을 부여받았습니다. 카톨릭 신자들이 세습받은 땅에 대해 확실한 소유권이 주어졌고, 십일조 징수권이 카톨릭 교회에게 이양되었습니다. 그들은 시민권도 자유롭게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그 결과 몬트리올을 비롯한 퀘벡 주에서 정치적으로는 영국의 지배가 계속되었어도, 카톨릭 교회의 문화와 교육제도는 잃어버리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더욱 견고해져만 갔습니다. 


또한 퀘벡은 프랑스 혁명이 지향한 자유사상을 거부했듯이 미국 혁명이 지향한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거부하였습니다.



 조셉 옥타브 플레시 Joseph-Octave Plessie 주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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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리앙 주교를 뒤이어 주교가 된 조셉-옥타브 플레시 Joseph-Octave Plessis 주교의 정치적인 활약도 매우 컸습니다. 그는 브리앙 주교보다 더 확실하게 영국정부에 복종했습니다. 그는 심지어 주교가 된 후에 카톨릭의 조직을 영국의 정부 아래에 두었으며 철저히 영국정부에 협조했습니다.


이러한 카톨릭의 협조를 고맙게 여긴 영국정부는 퀘벡의 카톨릭을 통제하려는 노력을 완화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국가보조금을 증가시켜 주기까지 했습니다. 또한 플레시 주교를 퀘벡의회의 공식 회원으로 받아들이는 파격적인 조치까지 해 주었습니다.

플레시 주교는 영국정부와 로마카톨릭 교황청과의 협상을 통해 퀘벡 전역으로 카톨릭교회의 지배력을 확장시켜 나갔습니다.


결론


퀘벡의 카톨릭 교회는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을까 염려를 많이 했습니다.  프랑스 혁명 이후 프랑스 카톨릭 교회는 주도권을 완전히 상실해 버렸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퀘벡에서는 프랑스 혁명을 혐오하며,  교황권지상주의 Ultramontanism 의 방향으로 더욱 급격히 기울게 되었습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불었던 자유의 바람도 퀘벡의 교황권지상주의를 흔들지 못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카톨릭 교회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복음 전파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은근하지만 꾸준하게 복음전파를 하기 시작하였습니다.

퀘벡과 몬트리올 사회의 정치, 종교적인 분위기는 카톨릭 교회가 리드해 가는 것처럼 보이지만, 하나님께서는  몬트리올과 카나다의 복음화를 위하여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의 영향력을 조금씩 서서히 키워가고 계셨습니다.  

                                      

♣ 역사를 통해 얻는 교훈


하나님은 중세시대 천년동안 곪을 대로 곪은 기독교를 영국과 독일등의 국가에서 종교개혁을 통해서 바로 잡으셨습니다. 그리고 영국이라는 나라를 통하여 그 복음이 흘러갈 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복음이 미국등에는 잘 흘러 들어갔지만, 유독 카나다의 퀘벡에서 만큼은 막혀버린 것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의 하나님 나라의 완성의 계획은 한치의 오차 없이 진행이 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마치 이것과 같습니다.  만약에 미국을 발견한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좀 더 일찍 발견했다면 부패한 정치와 혼합된 중세의 기독교가 그대로 흘러 들어갔을 것입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이후 영국의 청교도가 미국에 상륙 하였습니다. 이 복음이 미국에서의 영적 대각성 운동과 맞물려 미국에서 폭발적 부흥이 일어났으며 아시아를 비롯한 열방에 선교사들을 파송하여 세계복음화에 쓰임받았습니다.


그렇다면 몬트리올을 비롯한 퀘벡은 언제 순수한 복음이 확산되어 세계복음화에 기여를 하게 될 것인가요?  그동안 정치와 결탁되어졌던 혼탁한 기독교가 충분히 빠져나가야 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그 일을 하고 계십니다.  지금 세계 각 지역에서 들어오고 있는 디아스포라 복음주의 기독교인들이 퀘벡에 더 많이 유입이 될 것입니다. 


영국의 청교도 복음주의자들이 미국에 들어왔을 때, 이들은 거칠 것이 없었습니다. 그때부터 작심하고 가정의 소소한 일상에서부터 국가의 사회 전반의 운영시스템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정신을 장착하였습니다. 이러한 노력을 통해 기독교가 사회 전반에 스며들게 되었습니다.


이제 하나님께서 순수한 복음으로 무장한 디아스포라 이민자들을 퀘벡으로 들어오게 하실 것입니다. 타락한 세상의 정치와 결탁한 기독교는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질 것이며, 하나님 나라를 꿈꾸며 복음을 들고 세상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불꽃같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께서는 어떤 방법으로, 어떠한 사람들을 통해  몬트리올에서 프로테스탄트 기독교 선교의 역사를 진행해 나가셨을까요?    다음 주 월요일 밤에 또 뵙겠습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