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몬트리올 발견과 첫 교회 시대 (1642~1760)


1. 몬트리올 발견

2. 초기 몬트리올의 성장

3. 퀘벡에서의 첫 예배

4. 퀘벡 초기 기독교인들

5. 퀘벡의 위그노 신자들

6. 몬트리올에 정착한  위그노 기독교인들


7. 카톨릭과 프랑스 문화의 출현과 확산

 

퀘벡 초기의 이주민들 중에는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교인이었던 위그노인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프랑스에서 피신 하거나 이주해온 이들은 퀘벡과 아카디아(연해주) 지역으로 이주해 온 이후에는 식민지 건설과 무역업등에 많이 투자하였습니다.

 

퀘벡의 초기 정착 시대에는 카톨릭과 프로테스탄트 기독교가 서로 갈등을 빚기도 했지만 비교적 평화롭게 지냈습니다. 그러나 한순간에 퀘벡에서 카톨릭의 종교와 문화가 깊이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크게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프랑스에서 낭트칙령 폐지되었기 때문입니다. 둘째는 예수회의 사제들이 퀘벡과 몬트리올에 진출한 것입니다.

 

8. 예수회 Jesuit 의 퀘벡 진출

 

퀘벡의 역사에서 주된 역할을 하게 될 예수회 사제들이 1625년에 도착하였습니다. 그들은 퀘벡에 오자마자 위그노 기독교인을 부정하고 위험한 인물들로 여기면서 프랑스에 고발하기도 하면서 퀘벡에서 쫒아내기 시작했습니다. 결과적으로 이주민들 안에 있던 프랑스 위그노 개신교인들의 신앙활동도 약화되어갔습니다.

     

                                                                                                                                                                                                                                                                                                                                                  

장 드 브레베 Jean de Brebeuf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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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회 사제들 중에서  탁월하게 선교했던 사람은 장 드 브레베 Jean de Brebeuf 였습니다. 브레베는 조지안 베이 Georgian Bay 근처에 선교지부들을 세우면서 휴런 Huron 원주민들을 선교하는데에 괄목할 만한 성공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휴런 원주민들을 선교하기 위해 자기들이 쉽게 먹기 힘든 그들의 더러워 보이고 덜 익힌 고기들을 전혀 게의치 않고 먹었습니다.

 

브레베는 휴런 원주민들이 이웃의 이로쿼이 Iroquoian 원주민에게 점점 압박을 받고 있으며, 전염병이 돌아서 부족들이 황폐하게 되었을 때에도 용감히 선교하는 데에 열심을 다했습니다. 많은 휴런 원주민들이 카톨릭 신자들이 되어갔습니다. 그는 휴런족을 위해 그들의 언어로 많은 기독교 문헌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브레베는 겨울이 긴 카나다에서 휴런 원주민들을 위해 그들의 언어로 캐롤송을 만들어서 불러주기도 했습니다.






나무껍질 거친 오두막집 안에, 여린 갓난아기가 있었지, 토끼털로 만든 누더기 옷이 아기의 포동포동한 살을 감쌌더군, 하지만 용감한 사냥꾼이 가까이 갔을 때, 높은 곳에서 천사가 큰소리로 노래했지, 예수 너의 왕이 나셨다. 예수가 나셨다.”

 

브레베는 이로쿼이 원주민에 의해 고문 끝에 죽음을 당했습니다. 브레베의 용기는 이미 원주민들 사이 널리 퍼져있었습니다. 이로쿼이인들은 브레베의 용기에 감탄을 하여 그의 용기를 얻을 수있을까 하여 그를 죽인 후에 그의 심장을 꺼내어 나눠 먹기까지 했습니다.





























 

♣  최초의 퀘벡의 카톨릭 주교 라발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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퀘벡과 몬트리올에 카톨릭 종교와 문화를 뿌리내린 인물들 가운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예수회 사제가 바로 프랑수아 사비에르 드 몽모랑시 라발 Fracois-Xavier de Montmorency Laval 입니다. 그는 퀘벡을 카톨릭 문화의 도시로 세운 장본인이었습니다.

원래 퀘벡과 몬트리올 지역은 프랑스왕이 카톨릭의 또 다른 그룹인 술피시안 Sulpicians 이라는 수도회에 하사했습니다. 그러나 라발 사제를 중심으로 한 예수회에 의해서 영향력을 행사하지도 못했습니다.

 

그의 카톨릭이 식민지 정부로부터 받은 후원은 어마 어마 했습니다. 정착민들에 대한 교구세 징수권을 얻어 그들의 연간 소득의 26분의 1을 받았습니다. 뿐만아니라 예수회는 퀘벡에서 많은 땅을 정부로부터 교부 받았습니다.

심지어 퀘벡 정부는 주민들에게 13%의 십일조를 거두어 들여서 그 비용으로 카톨릭 교회들로 하여금 건강과 교육등 사회 복지를 책임지게 했습니다.

 

그는 인디언 원주민들을 파렴치한 상인들로부터 보호하는 역할도 했습니다. 프랑스 무역상인들이 인디언 원주민들에게 술을 판매하는 것을 제한시켰습니다.

 

그는 교육에도 큰 관심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1663년에는 퀘백에 사제 배출과 훈련을 위한 신학교를 세우기도 하였습니다. 이 신학교가 후에 라발대학이 된 것입니다.

 

9. 퀘벡의 교황권 지상주의 Utramontanism

 

이렇게 라발 사제가 영향력있게 카톨릭 선교를 하는 중에 1674, 그는 로마 교황청으로부터 퀘백 교구의 초대 주교로 임명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가 주교가 된 이후에 퀘벡에서 지금까지 해왔던 것과는 비교가 안될정도로 폭넓은 활동을 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퀘벡은 카나다에서 어느 누구도 감히 건드리지 못하는 거대한 카톨릭 종교 문화의 중심지가 되어갔습니다.

 

가장 큰 영향력은 퀘벡에서 로마카톨릭의 교황의 위치가 엄청나게 높아진 것이었습니다. 퀘벡에 카톨릭 종교와 문화가 뿌리를 내리는 때인 16세기와 17세기에 프랑스에서는 이미 교황의 권위가 많이 약화되었습니다. 국왕이 교회의 실제적인 실권자가 되어있었습니다. 교회의 권위가 국왕으로부터 온다는 교황권 제한주의 Gallicanism 가 실현되는 국가가 되어있었습니다.


그러나 그와는 반대로 퀘벡의 카톨릭은 교황권지상주의’ Ultramontanism 로 점차 확정지어갔습니다. 교황권 지상주의란 교회의 권위가 로마교황으로부터 온다고 믿는 것입니다. 교회에 대한 충성을 강조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처음 만들어진 용어입니다. 퀘벡을 교황권지상주의나라로 만드는데 가장 큰 공헌을 한 사제가 바로 라발 주교였습니다.

 

라발의 영향력으로 인하여 퀘벡의 카톨릭 역사는 프랑스와 크게 달라지게 되었습니다. 프랑스의 로마카톨릭교회가 계몽주의와 프랑스 혁명의 영향으로 카톨릭 교회가 개혁되어가고 있는 마당에 퀘벡의 카톨릭은 엄청난 보수주의를 유지했습니다.

퀘벡의 카톨릭 사제들은 지속적으로 교황에게서 명령을 받았으며, 그들은 퀘백인의 삶에 거의 중세적인 통치가 이루어지기를 바랐습니다.

 

10. 낭트칙령 폐지

 

퀘벡에서 예수회의 적극적인 활동과 더불어서 프랑스 정부와 교황청에서도 적극적으로 퀘벡의 카톨릭 보수화를 지원했습니다. 리셜리유 Richelieu 추기경이 프랑스 왕립협회의 수장이 되면서 개신교의 활동이 급격히 줄어들게 되었습니다. 그는 신앙의 자유를 허용했던 낭트칙령을 프랑스에서 폐지되기 훨씬 전에 퀘벡 식민지에서 그것을 철회 시켜버렸습니다.

 

게다가 1664년 이후에 퀘백에서 태어난 아기들은 카톨릭 교회에서만 세례 받아야만 했으며 결혼도 카톨릭 교회에서만 하는 제도를 만들었습니다. 사망시에도 역시 강제로 카톨릭에서만 장례를 하게 했습니다. 모든 개신교 기독교적인 물품들이 몰수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카톨릭교인이 아니면 공동묘지 밖에 묻히게 되는 차별을 받기도 했습니다. 어린이들은 강제적으로 카톨릭 학교에 가야만 했습니다.

 

결국 퀘벡의 개신교인들은 강제로 자신의 신앙을 포기하게끔 강요당하였습니다. 그들은 포기각서를 써야했습니다. 포기각서를 쓰면 특별한 생활보조금을 지급했습니다. 또한 어떠한 범법행위로 인해 교도소에 가야하는 것을 취소시켜 주는 혜택을 주기도 했습니다. 1978년에는 퀘벡에서 식민지 초기에 자신의 개신교 기독교를 포기한다는 포기각서 800개가 발견되기도 하였습니다.

 

결국 신앙을 지키기 위한 개신교의 신자들과 교회들은 카톨릭의 핍박을 피해 자신의 신앙을 숨길 수 밖에 없었습니다.

 

점차적으로 몬트리올을 비롯한 퀘벡에서 카톨릭은 커다란 지배세력이 되어갔으며 퀘벡은 오직 유일한 카톨릭 신앙만을 가져야하는 유니폼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결과

 

이러한 연유들로 인하여 17,8세기의 프랑스령 퀘벡에 세워진 카톨릭 사회는 기타 다른 지역들과 매우 다르게 비춰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이어지는 시대에서도 퀘백의 카톨릭 문화는 북아메리카의 개신교 기독교 사회와 뚜렷이 대조가 되었습니다. 미국과 카나다의 다른 지역은 물론이고 심지어 프랑스의 카톨릭 문화와도 다르게 발전하였습니다.

 

퀘벡의 개신교의 역사는 이로인해 예수회가 도착한 1625년부터 영불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하는 1760년까지 퀘벡과 몬트리올에서 개신교의 역사 발전은 오히려 퀘벡의 초기 이주 시대보다 퇴보되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역사를 통해 얻는 교훈

 

퀘벡과 몬트리올에서 우리 개신교의 발전이 약화된 이유는 카톨릭에 대한 프랑스의 적극적인 지원과 예수회의 진출로 인한 외부적인 데에서 그 이유를 찾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개신교의 내적인 원인들도 있습니다. 

프랑스에서 핍박등을 피하여 퀘벡등으로 이주한 프랑스 프로테스탄트 기독교인들은 식민지를 선교지역과 혹은 이주지역으로 보기보다는 비즈니스 투자지역으로 보는 경향이 강했습니다. 그들은 퀘벡과 유럽 사이의 대서양을 횡단하며 하는 무역을 통해 많은 부를 획득했습니다

 

반면에 카톨릭 예수회 사제들은 새로운 땅의 원주민들을 카톨릭으로 전도해야할 선교지역으로 보았습니다. 물론 프랑스 정부와 로마 교황청의 막대한 지원도 있었지만, 퀘벡으로 이주한 정착민들이 식민지를 선교지로 여기며 사역을 한 것이 카톨릭 종교와 문화가 뿌리를 내리게 되는 커다란 이유가 되었습니다.

 

쟝 드 드레베와 같은 사제의 선교 자세는 지금도 세계선교를 하고있는 교회들과 선교사들이 본을 받아야할 자세이기도 합니다.

원주민들을 선교하기 위해 먹기힘든 그들의 음식을 먹으며, 그들의 옷을 입으며, 그들의 언어를 익히면서 선교했던 것은 현대의 문화선교에도 좋은 선례가 됩니다.

 

한국 황해도의 한 마을 전체를 복음화시킨

  윌리엄 존 멕켄지 William John Mckenzie 선교사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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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은 날짜: 2007년 05월 14일 오후 11: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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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존 멕켄지 선교사


예수회에 장 드레베 사제가 있었다면 카나다에는 한국선교에 커다란 공헌을 윌리엄 존 멕켄지 William J. Mckenzie 선교사가 있습니다. 19세기에 한국의 최초 교회 황해도 소래교회를 세운 카나다의 존 멕켄지 선교사가 장 드 브레베 버금가는 자세로 선교하여 한국 복음화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습니다.

 

그는 카나다 노바스코샤의 케이프 브레튼에서 출생했습니다. 그의 가족은 스코틀랜드 이민자들이었습니다. 그의 할아버지는 늘 그에게 하나님 말씀과 자신의 신앙의 경험을 들려주었으며 존 멕켄지 선교사는 어릴 때부터 자연스럽게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귀하다는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그는 선교사로 헌신하기 전에 원주민 마을에 많은 단기선교를 하기도 하였습니다. 그는 한국 선교를 결심하면서 다음과 같은 일기를 기록하였습니다.

 

“.... 예수회에 속한 선교사들이 그들의 신앙을 위해 갖은 고난을 당했다. 왜 사도바울이 했던 것처럼 그 곳에 가서 복음을 전하지 않는가? 어떤 방법으로든지 한국에 가자. 현지에 도착해서 어떤 형태로든지 노동을 한든지, 직업을 찾든지, 그들과 더불어 생활하면서 복음을 전하자. 그런 후에 도움이 필요하다고 생각되면 캐나다 교회에 설득하리라....”

 

존 멕켄지 선교사는 18931212일에 한국에 도착하여 그 다음해 23일에 황해도 소래에 도착해서 선교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한국인들을 전도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 가운데 그는 빠르게 한국 언어를 배웠습니다. 그는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이미 빨리 빨리’, ‘불 좀 피우세요’, ‘밥 두 그릇만 주세요’ ‘국 좀 주세요등등의 말을 사용할 줄 알았습니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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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은 날짜: 2007년 05월 14일 오후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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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멕켄지 선교사가 지냈던 집.

 

황해도 소래에 정착하여 선교할 때는 그 주민들과 더욱 친근해지기 위해 옷을 한복으로 갈아입었습니다. 수줍음이 많았던 한국의 어린이들과 부녀자들도 수줍음을 버리고 메켄지 선교사에게 가까이 갈 수 있었습니다.

 

또한 그는 한국사람들과 더욱 가까워지기 위해 한국음식만을 먹기로 결심했습니다. 그는 소래마을에 들어온 후부터 일체의 서양음식을 끊고 주민들과 똑같은 한국음식을 먹으며 생활을 했습니다. 서양인들이 먹기 쉽지않은 밥과 김치를 그는 한국에서 죽을 때까지 먹었습니다. 그는 한국이 되어 한국인을 선교하고자 했습니다.

 

한번은 서울에서 선교하던 언더우드 목사 부부가, 서양음식을 만들어서 매켄지 선교사에게 보낸 준 적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매켄지 선교사는 그 서양 음식을 먹지 않고 동네아이들을 불러 나누어 주었습니다. 그는 서양음식을 먹는다면 다시는 한국 음식을 먹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만큼 한국음식을 먹는 것이 그에게 쉽지않았지만, 그는 오직 한국사람들을 전도하기 위해 서양음식을 일체 끊고 한국음식만을 먹었던 것입니다.

 

멕켄지 선교사는 순식간에 마을의 영웅이 되었습니다. 마을의 자랑거리가 되었습니다. 그는 키가 190 cm 나 될 정도로 거인이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마을에 호랑이가 나타나면 으레 멕켄지 선교사가 잡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그는 황해도 소래에서 교회를 세운 후 몇 일 후에 1995623일에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고 하는 요한복음1224절의 말씀을 전하면서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가 죽은 후에 소래 마을을 보니 마을 사람들 대부분이 기독교인들이 되어 있었습니다. 우상숭배와 술 주정꾼이 득실거리던 마을이었지만 완전히 기독교인 마을이 되었습니다. 그 마을에서는 인사도 서양식 악수를 했습니다. 그만큼 존 멕켄지라는 한 명의 선교사의 영향력이 얼마나 컸는지 알 수 있습니다. 그의 순교 후에 소래마을에서는 존 메켄지 선교사의 고향 카나다에 존 멕켄지 뒤를 이을 선교사를 보내줄 것을 부탁하는 호소문을 보내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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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찍은 날짜: 2007년 05월 14일 오후 11: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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멕켄지 선교사와 소래마을 주민들과 함께 세운 한국 최초의 소래교회

 

당시에 카나다 몬트리올에서 발행되던 가장 대중적인 Weekly Witness 신문에 존 멕켄지의 순교에 대한 기사가 실렸습니다. (18951217일자)








   

서울에서 온 윌리엄 존. 매켄지 William John Mckenzie 선교사의 사망 소식은 여러 주일 동안 확인되지 않고 있다가 결국 확인되었다. .... 그는 장로교단의 목사로서 노바스코샤 주에 안락한 자리를 맡아 목회하면서 고향에서 편안한 미래를 보낼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평생의 사명이 조선에 있다는 확신을 가졌으며 아무런 후회없이 즐거운 마음으로 그것을 받아들였다. 매켄지선교사는 그의 선교사업에 대해 뚜렷한 목적이 있었다.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가능한 한 직접적인 방법을 택했다. 그가 선교사로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자랑할 만한 일이 있다면 예수그리스도를 통해 한국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해 내는 것이며, 이 구원받은 영혼들이 자기 손으로 교회를 세우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가 가졌던 한 가지 목적은 한반도 전역을 복음화 화하는 것이었다....”

 

그 이후 카나다 장로교회에서 한국 소래지역 선교를 결의하여 세 부부를 파송하였습니다. 하지만 이미 이곳에는 미국장로교회의 선교사들이 사역을 하고 있었기에 그들은 강원도의 원산 지역을 선교하기로 했습니다. 1903년 이 지역에서 카나다 선교사들에게 불붙었던 성령의 불길이 후에 평양에 까지 퍼져나가 1907년 한국부흥의 전환점이 되었던 평양 대부흥 운동의 출발점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지금도 한국에서 순교했던 윌리엄 존 메켄지 선교사님의 설교가 귓가에 맴도는 듯 합니다.

 

여러분! 제가 고국을 떠나는 것은 결코 희생이 아닙니다. 오히려 이곳에 머물러 있다는 것이 희생입니다. 이제부터 조선(한국)은 내가 선택한 나의 육친의 나라입니다. 하나님! 나로 하여금 당신의 영광을 위하여 오래오래 그 일터에서 일하며 살게 해주소서. ‘사망이 생명에게 삼킨 바 되는심판의 날 공중에서 큰 나팔소리가 들릴 때까지 나의 뼈가 그 곳에 묻혀있게 해주소서

    

이제 다시 퀘벡과 몬트리올의 역사로 돌아오겠습니다.  1763년 영불전쟁에서 영국이 승리함으로 로마카톨릭이 주류인 퀘벡에서 프로테스탄트가 선교의 주도권을 가질 수 있는 기회를 얻게되었습니다. 그러면서 몬트리올에 두번째 교회시대가 펼쳐집니다.

                                                                                                                           .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