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부터 약 10회에 걸쳐 몬트리올 교회사 이야기를 연재합니다. 모든 독자 여러분에게 하나님이 이 땅의 역사를 이끌어 가시며 결국 완성된 하나님의 나라를 세우신다는 믿음이 생겨나기를 기원합니다.

 

저는 한국과 일본의 교회사를 연구하며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께서 지금도 이 곳의 역사에 개입하시며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신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주권 신앙은 200054일에 몬트리올에 도착하여 이민 목회를 하며 더욱 확신을 갖게 되었습니다. 몬트리올한인감리교회에서 목회하며 동시에 틈틈히 Acadia University의 몬트리올 캠퍼스 연구원 과정과 Grand Seminary에서 퀘벡기독교 역사를 배우고 연구할 수 있었습니다. Richard Lougheed 교수님과 함께 한 퀘벡, 특히 몬트리올 기독교 역사를 배우며, 그 역사의 현장들을 방문하는 시간들은 저에게 생동감이 넘치는 즐거운 시간들이었습니다. 이곳 몬트리올에 어떻게 처음으로 복음이 전파되었는지 배울 때마다 하나님의 섭리를 깨닫는 뜨거운 성령의 감동을 느끼기도 했습니다.

 

지금의 시대는 크리스천마저도 성경은 믿는다고 하지만 하나님의 주권이 임하는 하나님의 나라를 소극적으로만 동의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신앙의 삶이 다른 어정쩡한 신앙의 자세를 취하고 있는 것이죠. 하나님의 사명이란 믿음과 신앙의 삶이 어우러질 때 개인의 인생에서부터 국가와 민족에 이르기까지 그 사명을 이루게 됩니다. '내가 왜 한국에서 태어났는지?' '내가 왜 이곳에 왔는지?' '내가 앞으로 무엇을 지향하며 살아야 하는지? 와 같은 개인적인 사명에서부터 하나님이 우리 민족과 내가 사는 이곳에 허락하신 특별한 뜻이 무엇인지 발견하게 됩니다.

 

저는 앞으로 몬트리올의 기독교 역사 이야기를 연재하며 전 세계에 흩으시고 계시는 한인 디아스포로 이민자들을 통해 이루어가실 하나님의 사명, 즉 하나님의 나라를 이루어 가는 사명을 발견하고 세워 가고자 합니다. 한국 교회가, 특히 한인 이민 교회가 하나님께 받은 시대적 선교 사명은 참으로 특출합니다. 각 자의 삶의 터전인 이민지역에서는 지역 선교사로, 복음이 들어가지 않은 미전도 종족에게는 가는 선교사로, 정치계, 경제계, 문화계등에서는 사회지도자 선교사로 세움받아 하나님 나라를 세워가는 사명을 받은 민족이 우리 디아스포라 한민족인 것입니다.

 

하지만 극복해내야 하는 과제가 있습니다. 세상은 내일을 예측하기 어려운 급속한 변화를 경험하고 있습니다. 이런 세상 속에서 가장 변화가 느린 곳 중의 하나가 교회입니다. 교회가 세상 속에서 세상을 이끌어 가야하지만 거꾸로 세상이 교회를 걱정하여 주는 시대가 되었습니다. 교회가 본질을 잃어가고 있는 것이죠. 저를 포함한 교회 지도자들의 잘못이 가장 큽니다.

 

이 몬트리올 교회사 이야기가 단순히 과거의 역사를 기록하고 소개하는 것으로만 끝나지는 않을 것입니다. 진리의 복음이 교회 울타리를 넘어서 세상 속으로 들어가, 아무리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고 포기할 수 없는 세계 민족 복음화를 이루어가는 비전을 제시하게 될 것입니다.  그 세계 복음화 가운데 한국 민족을 어떻게 쓰시는지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몬트리올 교회사 이야기

 

머리말

 

우리가 살고 있는 이 몬트리올 Montreal 은 언제 시작이 되었을까요? 물론 그 시작한 때를 알기 훨씬 전에 원주민들이 이 곳에 살고 있었습니다. 몬트리올 이라는 이름이 붙혀진 도시로 시작된 것은 프랑스 이주민들이 정착하면서 시작이 되었습니다.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대륙의 탐험이 한 참 진행되고 있을 때였습니다.

 

유럽인들의 아메리카 발견은 15세기말, 종교개혁이 시작되기 불과 한 세대 전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당시의 서유럽의 나라들은 16세기에 들어서서 그 이전의 어느 때 보다도 더 강하고 더 공격적으로 탐험을 할 때였습니다. 탐험을 통해 아메리카 대륙의 식민지를 공격하면서 프랑스 정부의 권력은 점점 더 확고해졌습니다. 그리고 프랑스 국민들은 재정적으로, 예술적으로, 그리고 문학적으로도 눈부신 성취를 거두고 있었습니다.

영국에서는 헨리7(재위1485-1509), 헨리8(1509-1547), 엘리자베스1(1558-

1603) 통치가 이어지면서 그들이 품은 야망만큼이나 영국을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시켰습니다.

스페인도 신대륙 탐험이 활발했습니다. 15세기의 마지막 수년동안에 페르디난드와 이사벨라 왕에 의해 통일왕국을 이루었고, 무슬림의 마지막 본거지였던 무어왕국을 물리쳤으며, 신세계 탐험의 주도권을 장악했습니다.

 

이러한 강대국들이 더욱 강성해지고 또한 포르투칼과 네덜란드가 그들 다음으로 강성해지면서 유럽에서는 해양제국의 주도권 경쟁이 매우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다가 인간의 이성적인 능력을 깨우게 되는 르네상스의 정신은 숨 막히는 유럽 전통에서의 해방을 약속하는 아메리카의 처녀지를 향해 탐험을 펼치도록 자극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것입니다. 유럽 각 국의 경쟁적인 신대륙 탐험이 진행되고 있을 때, 유럽의 기독교 신자들도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아메리카 대륙에 기독교의 복음을 심고자하는 노력들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노력은 우리가 잘 아는 탐험가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에게서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단순한 탐험가로만 알려져 있지만 아메리카 대륙을 복음화 하고자 노력한 흔적들이 있었습니다.

그가 1492년의 아메리카 여행을 하면서 쓴 일기의 내용은 참으로 흥미롭습니다. “우리의 거룩한 신앙으로 원주민들을 개종시킬 방법이 있을 것이다놀랍게도 그의 일기의 내용은 신대륙을 복음화 하고자는 열정이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가 세 번째 항해 후에 쓴 예언의 책(A book of Prophecies)"에서 아메리카에 대한 복음화의 사명과 관련된 성경구절들을 많이 인용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는 나에게 유익이 되는 것은 이성도 수학계산도 세계지도도 아니며, 오히려 이사야의 예언이 완전히 성취되는 것이다하면서 이사야서 46;11절을 인용하기도 하였습니다.

 

내가 동쪽에서 사나운 날짐승을 부르며 먼 나라에서 나의 뜻을 이룰 사람을 부를 것이라 내가 말하였은즉 반드시 이룰 것이요 계획하였은즉 반드시 시행하리라

 

신대륙의 복음화를 위해 하나님께서 자신을 부르시고 그 곳까지 보내셨다는 고백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콜롬버스의 부하들이 무자비하게 살상과 강간과 약탈을 자행했지만, 콜럼버스의 기독교 선교에 대한 열정은 컸었던 것 같습니다.

 

 

                    Ⅰ. 몬트리올 발견과 첫 교회 시대 (1642~1760)

 

1. 몬트리올 발견

 

이러한 탐험의 시대에 몬트리올은 어떻게 시작되었을까요? 몬트리올을 처음으로 발견한 사람은 프랑스 탐험가 작 카르티에 Jacques Cartier 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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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367pixel, 세로 480pixel 그는 1491년 브리타니 항구도시인 생 말로, Saint-Malo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는 1520년 메리 캐써린  Mary Catherine 과 결혼한 이후에는 그 지역 내에서 증인이 되는 서명자로서 덕망이 높은 사람으로 인정을 받아 왔습니다. 그러던 중에 그는 당시 프랑스 왕이었던 프란시스 1세때 아메리카 대륙을 탐험하게 되었습니다.

 

작 카르티에는 1535102일에 몬트리올 섬을 처음으로 방문한 유럽 탐험가가 되었습니다. 물론 그때까지는 아직 몬트리올이라는 이름이 없었습니다. 그가 몬트리올에 도착했을 때, 원주민들의 안내를 받으며 섬으로 된 몬트리올의 한 가운데 있는 몽로얄 Mont Royal 산에 오르게 되었습니다. 몬트리올은 주변이 강으로 둘러싸인 섬이며 도시 한 가운데에  산이 있었습니다. 작 카르티에는 이곳을  ‘Mont Real’ 이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Mont’은 산이라는 뜻이며, ‘Real’은 국왕 ‘Royal'의 옛 불어 단어입니다 그는 이 도시를 프랑스 국왕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뜻으로 몬트리올 Mont Real 이라고 이름을 붙힌 것이지요. 그 이후 1642년부터 몬트리올에 이주민들이 들어오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Mont'와 'Real'을 합쳐 ’Montreal'이라는 이름을 사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Mont Real(Royal)이 지금의 Montreal 이라는 이름을 낳게 한 것이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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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몬트리올 다운타운에서 본 몽로얄 산  


물론 작 카르티에가 몬트리올을 방문하기 전에도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그가 처음으로 만났던 원주민 공동체가 있었는데, 바로 오셜라가 Hochelaga 라고 하는 이로쿼이 Iroquoian 원주민 공동체였습니다. 이들을 용맹스런 모학 Mohawk 원주민 전사들이라고도 부르지요. 작 카르티에는 몬트리올에 있는 동안 이들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작 카르티에를 몽로얄산으로 안내한 원주민들이 바로 이 오셜라가 원주민 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작 카르티에는 몬트리올을 호셜라가 라고 부르기도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셜라가는 몬트리올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것이죠. 하지만 그 공동체는 사무엘 샴플랭 Samuel de Champlain 이 들어왔을 때는 이미 사라져 버렸습니다. 몬트리올의 외곽 지역으로 옮겨갔기 때문이지요,

 

작 카르티에는 단순한 탐험가로만 알려져 있었지만 그가 몬트리올의 원주민들과 가깝게 지내면서 기록한 일기의 내용들을 보면 원주민들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고자 하는 노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일기에 하나님 없이 살고 있는 그들을 보며, 나는 만일 그들에게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이끌 어떠한 방책을 마련하는 일에 종사하지 않는다면 반드시 큰 죄를 짓게 될 것이라고 개인적으로 판단했다.” 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프랑스에서 프랑스 개신교였던 위그노 장로교교인이었다고도 알려지기도 했습니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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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250pixel, 세로 377pixel 한편 퀘벡을 발견한 사람은 샴플랭 Samuel de Champlain 입니다. 그는 프랑스 정부에 의해 공식적으로 파견된 관리였습니다. 그가 1608년에 퀘백시를 발견하였습니다. 그리고 자주 몬트리올 섬을 방문하곤 하였습니다. 이때부터 프랑스 정부가 몬트리올이 속해 있는 퀘벡의 실질적인 식민지 주인 노릇을 하게 되었습니다.

샴플랭에게 있어서, 몬트리올 섬은 대륙 안쪽으로 이어지는 강의 끝부분에 위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오타와강과 리셜리외 강 The Richelieu 그리고 샴플랭 Champlain Lake 로 알려진 강의 중심부가 탐험의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위에서도 잠깐 언급했지만 작 카티에가 몬트리올을 발견한 후에 유럽 이주민들이 처음으로 몬트리올에 들어와 정착한 날은 1642518일이었습니다.

프랑스왕이 몬트리올을 프랑스의 한 한 카톨릭 그룹이었던 술피시안 Sulpician 에게 하사였고, 그들의 후원으로 몬트리올에 최초의 이주민들이 들어오게 되었습니다.


 그 날 메조네브 Sieur de Maisonneuve 로도 알려진 폴 드 쇼메디 Paul de Chomedy, 쟝 만스 Jeanne Mance 를 비롯한 45명의 이민자들은 첫 날 배에서 밤을 보낸 후에 몬트리올 육지로 들어왔습니다. 이 날은 이들이 몬트리올에 상주하는 첫 유럽 이민자들이 되는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이들은 몬트리올에 도착한 후에 첫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들도 작 카르티에처럼 몬트리올에 자신들이 원하는 의미를 담아서 새로운 이름을 붙혀서 불렀습니다. 이들이 도착한 다음 해인 1643년에 몬트리올에서 큰 홍수로 물이 범람하여 모두 죽을 위기에 처했습니다. 메조네브는 곧 동정녀 마리아에게 홍수로 인해 범람하는 것을 막아달라고 기도했고, 곧 이어 물이 줄어들었다고 합니다. 이것을 기념하여 이들은 몽로얄 Mont Royal 산 꼭대기에 커다란 십자가를 세웠고 몬트리올을 동정녀 마리아가 보호한다는 의미 마리아 도시’ Ville Marie 라고 이름을 붙였습니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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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170pixel, 세로 256pixel

몽로얄 산 꼭대기에 세운 이 십자가는 지금까지 유지되어 오고 있습니다. 그래서 프랑스 국왕에게 영광을 돌린다는 의미의 몬트리올의 또 다른 이름은 ’Villa Maria'인 것입니다.

  

* 역사에서 얻는 교훈


몬트리올의 초기 역사를 살펴보면서 기독교인으로서 느끼는 것이 있습니다. 기독교인이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를 나의 구주, 나의 주님으로 믿고 사는 신자들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내가 사는 곳이 예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를 꿈꾸는 사람들이지요. 좀 더 구체적으로 몬트리올에 사는 기독교인이란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그들은 하나님의 때에 이곳 몬트리올은 인류의 구원을 위해 하늘 영광의 보좌를 버리시고 십자가를 지신 예수님이 다스리는 하나님 나라가 될 것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이 믿음으로 몬트리올에서 살게 된다면 몬트리올은 세상 나라의 왕에게 바쳐진 도시가 아니며 마리아가 보호하는 도시도 아닌,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이 다스리는 도시, 몬트리올 MontReal 이 되는 것입니다.

    

 2. 초기 몬트리올의 성장.


작 카르티에에 의해 몬트리올이 발견되고 이주민들이 정착한 후 100년이 지나면서 까지도 몬트리올의 거주자들이 100명도 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1700년까지 겨우 2천명 정도가 몬트리올에 살았습니다.

나중에 구체적으로 설명하겠지만 당시 몬트리올의 소유권을 가지고 있었던 프랑스 왕은 후에 몬트리올 술피시안” Sulpicians 이라는 프랑스의 한 카톨릭 그룹에게 하사했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몬트리올의 주인 된 마음을 가지고 조심스럽게 몬트리올에 이주하여 정착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몬트리올 외곽 지역에 술피시안 Sulpicians 이라는 이름을 가진 타운이 있습니다.

 

1608년 사무엘 드 샹플랭 Samuel de Shamplain 이 퀘백을 발견한 후부터 1760년 영불 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할 때까지 퀘벡주를 프랑스가 지배해왔기 때문에 몬트리올도 자연스럽게 프랑스가 지배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영불전쟁에서 프랑스가 패배를 당하여 소유권이 영국으로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프랑스가 영국에 패배했지만 퀘백 주는 현재까지도 미주지역에서 프랑스 카톨릭 문화의 중심지로 존속해 오고 있습니다. 그런 까닭에 카나다에서 퀘벡의 존재는 아메리카 대륙의 다른 지역과 구별되는 지역이 되었습니다.

 

몬트리올의 성장은 매우 느렸습니다. 물론 몬트리올은 모피 무역의 큰 중심지였으며 대륙 탐험의 출발지였습니다. 몬트리올은 모피 무역등으로 많은 경제적이 이득을 가져다 줄 수 있는 지역이었습니다

몬트리올 정착민들은 알공퀸 Algonquin 원주민들과는 평화롭게 지냈지만, 이로쿠이 Iroquois 원주민들과 전쟁을 벌였습니다. 이 원주민들과의 전쟁들은 섬 발견 이후에 60여년동안 이주민들의 숫자를 더욱 줄어들게 만들었습니다

 

그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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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그림의 크기: 가로 468pixel, 세로 585pixel

  대표적인 큰 전쟁은 1660년에 퀘벡의 식민지 사령관이었던 돌라드 Dollard des Ormeaux 가 오타와 강을 끼고 소위 롱 솔트 전투’ Battle of Long Sault 으로 알려진 이로쿼이 원주민들과 벌인 전쟁이었습니다. 그 전쟁에서 당시 몬트리올에 거주하고 있던 600여명이나 되는 이민자들이 거의 모두 죽음을 당하기도 하는 큰 재앙을 당하였습니다.

 

또한 1689년에는 Lachine에서 프랑스 이민자들이 원주민들에게 대 학살을 당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외의 크고 작은 원주민들과의 전쟁으로 인하여 이민자들의 삶은 매우 거칠고 힘들고 위험하였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오늘날의 몬트리올은  400만명이 넘는 대도시가 되었으며, 셜부륵 Sherbrooke 길과 매우 번화한  생 캐써린 St.-Catherine 거리에 병원을 포함한 똑바로 세워지는 빌딩들이 세워져 온 거대도시가 된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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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몽로얄 산에서 바라 본 몬트리올의 겨울 풍경


지금은 몬트리올은 추위를 피할 수 있는 땅 밑의 도로들이 발달해 있고, 많은 눈이 와도 바로 바로 재설작업이 잘 진행되고 있기 때문에 비록 겨울이 길다 하여도 생활하기에 큰 불편함이 없습니다. 하지만 몬트리올의 처음 이주민들이 부서지기 쉬운 울타리가 있는 집에서 맞이하는 겨울을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하는 것은 쉽게 상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힘들고 거친 초기의 삶 가운데에서도, 모피무역이 점차적으로 확장이 되면서 몬트리올의 거주자들이 늘어갔습니다. 또한 원주민들과의 전쟁도 줄어들면서 몬트리올은 서서히 카나다에서 중심적이 도시가 되어갔습니다.

 

그러나 그때에 영국과 프랑스 간의 전쟁들이 유럽과 북아메리카 지역을 중심으로 해서 증가해 갔으며 이것이 몬트리올의 성장에도 위협이 되기도 하였습니다.

                                                                                                                              ..... 계속